도장 하나에 걸린 정당성
구속영장이 겨눈 곳은 정치인의 사무실이 아니라 토지 등기부에 도장을 찍던 창구다. 붙잡았다는 사실과 유죄라는 사실은 다른 무게를 가진다.
도장 하나. 인도네시아 어디서든 공장이나 창고 부지를 등록할 때 마지막 순간에 찍히는 그 도장이다. 9월 15일, 그 도장을 찍어 주던 창구 자체가 반부패위원회(KPK) 수사관들 앞에 섰다.
KPK가 보고르와 탕그랑 지역의 건물사용권(HGB) 발급을 둘러싼 뇌물 수수 혐의를 포착했다. 현장급습(OTT, Operasi Tangkap Tangan)을 벌인 결과다. 여덟 명이 정식 용의자(tersangka) 신분으로 구속됐다. 람프리, 손탕 코인 마누룽, 파드 A 라픽, 아드리안토 피토조 아디가 그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아리프 수기얀토, 무함마드 파크리, 에르윈, 리잘 팔레피다.1 국토공간계획부(ATR/BPN) 산하 국토정리단속국장 람프리가 공무원이다. 보고르1군 토지사무소장 손탕 코인 마누룽도 공무원이다. 전 께붐군 군수 아리프 수기얀토도 공무원이다. 골카르당 정치인 파드 A 라픽도 이름을 올렸다. 대형 상장 개발사 서머레콘의 대표이사 아드리안토 피토조 아디도 이 여덟 명 중 하나다. 현장급습 당시에는 이들을 포함해 열일곱 명이 함께 구금됐다. 탕그랑시 토지사무소장 타르디도 그중 한 명이었다. 다만 정식 용의자 여덟 명 명단에는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구금 기간은 9월 15일부터 10월 4일까지, 20일이다.1 압수액은 당초 조 단위로 잘못 보도됐다가 Rp106.3 miliar(약 1,063억 루피아)로 정정됐다.2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번에 구속영장이 겨눈 자리는 어느 정치인의 사무실이 아니다. 토지 등기부에 도장을 찍던 말단 행정 창구다.
HGB는 건물사용권이다. 인도네시아에 공장이나 물류센터, 산업단지 부지를 가진 기업은 대개 이 권리로 땅을 쓴다. 그 권리를 내주고 갱신해 주는 창구가 바로 보고르1군과 탕그랑시 같은 지방 토지사무소다.
이번 수사가 겨눈 것은 특정 부지 하나가 아니라 그 창구 자체다. 그런데 그 창구를 거친 발급 건 가운데 하나는 이미 이름이 특정됐다.
대형 상장 부동산 개발사 서머레콘(Summarecon)의 HGB 인허가 건이다. 자카르타증권거래소 코드는 SMRA다. Tribunnews·Kompas 등 복수 매체가 이를 보도했다. 기사 제목부터 ‘서머레콘 HGB 뇌물 의혹’을 명시했다.3 인도네시아 증시에 상장된 대형 개발사의 인허가 건이다. 서머레콘은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에서 산업단지와 신도시를 함께 개발해 온 상장 개발사로 알려져 있다. 이런 규모의 개발사가 쓰는 HGB조차 뇌물 의혹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보다 작은 개발사나 개인 소유주의 인허가 서류는 무엇을 근거로 믿어야 하나. 창구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발급 절차 전체의 신뢰도를 묻는 질문이다. 이 사실은 이 사건을 지방 소도시 토지사무소 하나의 국지적 비리로 좁혀 볼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서머레콘 대표이사 아드리안토 피토조 아디 본인이 8인 용의자 중 한 명이다. 가정이 아니라 이미 당사자가 그 회사 안에 있다는 뜻이다. 서머레콘과 지분·합작 관계가 있거나 인접 부지를 보유한 한국 기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번 사건을 남의 창구 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는 이유다.
사건이 커지자 법학자 수파르지 교수가 제동을 걸었다. KPK가 무죄추정 원칙을 침해하는 예단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4 현장에서 붙잡힌 장면이 워낙 선명해서, 그 경고는 소음처럼 들리기 쉽다.
여기서 셈법이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현장에서 붙잡았으니 사실상 끝난 사건이라는 셈법이다. 다른 하나는 예단의 위험이 있으니 전부 유보하자는 셈법이다. 둘 다 틀렸다.
먼저 첫 번째 셈법. 정말 그런가. 현장급습은 형사 절차의 초동 단계일 뿐이다. 여덟 명은 모두 재판을 받지 않은 용의자 신분이다.1 구금 20일은 형이 아니라 수사를 위한 초동 구금 기간이다. 압수액 단위가 조에서 십억대로 정정된 사실도 셈법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속보의 속도와 사실의 정확성은 원래 같은 속도로 가지 않는다. 현장에서 붙잡힌 순간의 스펙터클과 법정에서 확정되는 유죄는 다른 무게를 가진 물건이다.
두 번째 셈법도 만만치 않게 쉽다. 과연 그럴까. 수파르지 교수의 경고는 유죄를 예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압수와 구속이라는 절차적 사실 자체를 의심하라는 뜻은 아니다. 이 둘을 섞으면 안 된다. 압수액이 확인되고 구금 기간이 명시된 것은 이미 벌어진 절차상의 사실이다. 누가 유죄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이 두 문장은 같은 문단에 나란히 놓여도 서로 다른 자리를 차지한다.
잡았다고 다 끝난 것도 아니고, 의심스럽다고 다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도 땅과 관련된 창구에서 비슷한 장면을 겪은 적이 있다. 공기업 직원들이 신도시 예정지의 땅을 미리 사들였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여론은 전원 구속과 전원 파면을 동시에 요구했다. 실제 수사와 재판은 그보다 훨씬 느리게, 훨씬 좁게 움직였다.5 창구의 신뢰가 흔들리는 사건일수록 여론의 속도와 절차의 속도는 벌어진다. 두 사건은 나라도 다르고 사건의 얼개도 다르다. 그런데 의심을 사는 지점만큼은 닮았다. 땅을 다루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그 결정으로 사익을 취했다는 의혹이 두 사건 모두의 출발점이다. 한쪽은 부지를 살 정보를, 다른 한쪽은 도장을 찍을 권한을 사익과 바꿨다는 의혹을 받는다. 그 의혹이 사실인지는 두 사건 모두 아직 법정의 몫이다. 다만 공직자의 손을 거친 서류가 한꺼번에 의심받는다는 사실만은 두 나라 모두에서 이미 벌어졌다. 창구를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이 퍼지면, 그 창구를 거친 모든 서류가 함께 흔들린다. 한국 기업이 인도네시아 사건을 남의 나라 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칼럼이 판단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해 둔다. 파드 A 라픽이 실제로 뇌물을 건넸는지는 법정이 가릴 일이다. 람프리를 비롯한 공무원들이 실제로 그것을 받았는지도 마찬가지다. 여덟 명 모두 지금은 혐의를 다투는 용의자일 뿐, 유죄가 확정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칼럼이 다루는 것은 유무죄가 아니라, 발급 창구 자체가 수사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 갖는 실무적 무게다.
자카르타나 인근 산업단지에 HGB로 공장 부지를 가진 한국 기업이라면 본사에서 전화가 올 것이다. “토지사무소가 통째로 수사받는다는데 우리 등기도 괜찮은가.” 이때 대관 담당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답은 이렇다. 이번에 수사 대상이 된 것은 보고르1군과 탕그랑시 두 곳의 특정 발급 건이다. 그중 하나가 서머레콘의 HGB 건이다. 서머레콘과 무관한 회사라면, 그 회사의 등기가 이번 발급 건과 관련이 있다는 근거는 지금 아무것도 없다. 창구 전체가 의심받는다는 사실과, 내 서류가 문제라는 사실은 다른 층위의 이야기다. 다만 서머레콘과 지분·합작·인접 부지 거래가 있는 회사라면 답은 다르다. 그런 회사의 등기는 이미 이번 수사의 사정권 안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 회사라면 대관 담당이 먼저 확인할 목록 맨 위에 ‘서머레콘 관련 거래·합작 여부’를 올려야 한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일도 아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 소문에 맞춰 등기 대행사를 바꾸는 일이 아니다. 이 HGB 인증서가 언제 어느 담당자를 거쳐 발급됐는지, 그 이력을 서류철에서 다시 한번 꺼내 보는 일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있다. 확인되지 않은 채로 본사 보고서에 “토지 등기 몰수 리스크”라는 굵은 글씨를 올리는 일이다. 아직 어떤 기업의 어떤 등기도 KPK가 문제 삼았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지켜볼 신호는 넷이면 충분하다. KPK가 특정 등기 건이나 기업명을 공식 발표하는지. 여덟 명의 용의자 신분이 정식 기소로 넘어가는지. ATR/BPN이 보고르·탕그랑 두 곳을 넘어 전국 단위로 HGB 발급 절차를 재점검하겠다고 밝히는지. 그리고 자사와 서머레콘 사이에 지분·합작·인접 부지 거래가 있는지. 이 넷 중 하나라도 움직이면 그때 실사 범위를 넓혀도 늦지 않다.
뇌물로 발급된 HGB 인증서가 이후 소급 무효화된 선례가 있는지는 이번 검토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없다는 근거로 쓸 수는 없다.
도장은 원래 결재의 무게를 증명하려고 찍는 물건이다. 그 도장을 찍던 손이 의심받는 지금, 무게를 다시 증명해야 하는 쪽은 도장이 아니라 사람이다. 서두르는 쪽도, 전부 덮어 두자는 쪽도 아직 그 증명을 손에 쥐지 못했다.
- 현장급습(OTT)은 9월 14일 벌어졌다. CNBC Indonesia와 Media Indonesia 보도 기준. 다음 날인 9월 15일 오전 수사 결과 발표(ekspose) 이후 이 중 여덟 명이 정식 용의자(tersangka)로 지정돼 구속됐다. 명단은 람프리, 손탕 코인 마누룽, 파드 A 라픽(Fahd El Fouz, 골카르당 정치인), PT Summarecon Agung Tbk 대표이사 아드리안토 피토조 아디, 아리프 수기얀토, 무함마드 파크리, 에르윈, 리잘 팔레피다. Tribunnews와 Beritasatu 보도 기준. 탕그랑시 토지사무소장 타르디는 현장급습 때 함께 구금된 열일곱 명 중 한 명이었으나 이 여덟 명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위 Tribunnews 보도에도 그의 이름은 없고, Tangerang Pos도 이를 제목으로 명시했다. 아리프 수기얀토가 전 께붐군 군수(eks Bupati Kebumen)라는 사실은 Tribunnews와 Kompas 보도 기준. 구금 기간(9월 15일~10월 4일, 20일)도 같은 보도들 기준이며, 원문은 대조하지 못했다.
- 압수액이 당초 조 단위로 보도됐다가 Rp106.3 miliar(약 1,063억 루피아)로 정정된 사실은 Beritasatu와 Tribunnews·Kompas의 후속 보도로 교차 확인됐다. Monitor Indonesia(2026-09-16)도 같은 수치를 보도했다. 후속 보도 원문은 대조하지 못했다.
- 이 수사가 대형 상장 부동산 개발사 서머레콘(Summarecon, IDX 코드 SMRA)의 HGB 인허가 건과 관련됐고, 서머레콘 대표이사 아드리안토 피토조 아디 본인이 8인 용의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Tribunnews와 Kompas가 기사 제목에서부터 명시했다.
- 수파르지 교수의 “무죄추정 원칙” 경고는 같은 Monitor Indonesia 보도가 전한 발언이다. 검색 요약 기준(원문 미열람)이며, 소속 기관·정확한 발언 전문은 대조하지 못했다. 이는 수파르지 교수 개인의 견해이며 편집국의 판단이 아니다.
- 한국 공기업 직원들의 신도시 예정지 사전 매입 의혹(2021년)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공개 기록 기준이며, 이번 근무에서 개별 수사·재판 결과를 다시 대조하지는 않았다. 인도네시아 이번 사건과 제도적으로 동일한 사례라는 뜻은 아니며, 여론과 절차 속도의 격차를 보여주는 일반적 거울로만 인용했다.
칼럼은 필자의 의견이며 koreadesk의 편집 방침이나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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