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장 한 장이 부통령직을 흔들 수 있나
문을 열어 준 법정에 이번엔 문을 닫아 달라는 청구가 들어갔다. 소란은 크고 확인된 것은 작다.
졸업장 한 장. 인도네시아 부통령직을 두고 지금 벌어지는 싸움의 무기가 그것이다. 총도 탱크도 아니고, 대학이 발급한 종이 한 장이다.
9월 10일, 헌법학자 데니 인드라야나가 헌법재판소(MK)에 청구서를 냈다. 유도요노 정부에서 법무인권부 차관을 지낸, 인도네시아에서 이름난 법률가다. 요구는 셋이다. 부통령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의 자격을 취소하라. 그를 확정한 선거관리위원회(KPU) 결정과 국회 승인을 무효로 하라. 빈자리는 프라보워 대통령이 추천한 두 후보 중에서 국민협의회(MPR)가 채우라. 이유는 하나다. 기브란이 부통령 후보의 최소 학력 요건을 채우지 못했다는 주장이다.1
요건 자체는 간단하다. 선거법(UU No. 7/2017) 169조 r호는 대통령·부통령 후보에게 고등학교 졸업이나 그와 같은 수준의 학력을 요구한다.2 기브란은 싱가포르와 호주의 학교를 거쳤다. 2024년 대선 후보 등록 때는 외국 학력을 국내 학력과 같은 수준으로 인정하는 동등성 증명서를 냈다. 청구인들은 바로 그 증명서가 요건을 채우지 못한다고 본다.2 쟁점은 졸업 여부가 아니라 서류의 효력이다. 이 차이는 뒤에서 다시 중요해진다.
시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프라보워·기브란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다 돼 가는 때다.2 청구인 명단에는 선거감시단체 KIPP와 움마트당(Partai Ummat) 같은 이름도 올랐다고 한다. 대통령실은 곧바로 강하게 반발했다.1 자카르타의 시사 유튜브는 며칠째 이 이야기뿐이다. 섬네일의 글씨는 늘 사건보다 한 뼘 크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기브란의 출마 길을 터 준 곳이 바로 이 헌재였다.
2023년 10월 16일, 헌재는 대통령·부통령 후보의 나이 제한 40세에 예외를 뒀다. 선거로 뽑힌 지방자치단체장 경력이 있으면 40세 미만도 출마할 수 있다고 했다. 결정 번호는 90/PUU-XXI/2023이다.3 당시 36세이던 솔로 시장 기브란은 이 결정 덕분에 후보 등록을 할 수 있었다. 이 사건 심리에 참여한 헌재소장 안와르 우스만은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매제, 곧 기브란의 고모부였다.3
뒷말이 없을 리 없었다. 3주 뒤인 11월 7일, 헌재 윤리위원회(MKMK)는 안와르가 중대한 윤리 위반을 했다고 판단했다. 공정성과 독립성, 품위 등 윤리 원칙을 어겼다는 것이다. 그는 소장직에서 해임됐다. 재판관 신분은 유지했다.3 그러나 결정 자체는 그대로 살아남았다. 사람은 징계를 받았는데 그가 참여한 결정이 연 문은 열린 채로 남은 것이다.
법정이 열어 준 문을, 이제 같은 법정에 닫아 달라고 한다. 이것이 이번 청구가 처음부터 안고 있는 역설이다.
역설은 하나 더 있다. 헌재는 이미 한 번 이 선거의 정당성을 판단했다. 2024년 4월 22일, 헌재는 낙선한 두 후보 진영이 낸 대선 결과 불복 소송을 모두 기각했다. 다만 재판관 8명 중 3명이 반대의견을 냈다.4 대선 분쟁에서 만장일치가 깨진 것은 이례적이었다. 법정은 결론을 냈지만 의문을 다 지우지는 못했다. 그 남은 의문이 2년 반이 지나 졸업장이라는 새 옷을 입고 돌아온 셈이다.
여기서 한쪽 편을 들기는 쉽다. 청구인 쪽은 헌법의 요건을 말하고, 대통령실은 청구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한다. 양쪽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절반만 본다. 정치가 풀지 못한 숙제를 판사에게 떠넘기는 버릇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다르지 않다. 판결이 마음에 들면 사법의 권위이고, 마음에 안 들면 정치 재판이다. 법정을 향한 박수와 야유는 판결의 내용보다 누구에게 유리하냐에 따라 자리를 바꾼다.
한국 독자에게도 낯선 풍경은 아니다. 정치가 막히면 헌법재판소 앞에 줄을 서는 장면을 한국 사회도 여러 번 봤다. 그럴 때마다 재판관들은 법복을 입은 정치인 취급을 받았다. 법정이 정치의 뒷설거지를 떠맡을수록 법정의 권위는 닳는다. 인도네시아 헌재는 2023년 이후 그 권위를 이미 한 번 크게 깎아 먹었다. 이번 청구를 어떻게 다루느냐는 기브란의 운명보다 헌재 자신의 신뢰가 걸린 문제일 수 있다.
소란이 커질수록 셈법은 단순해진다. 가장 흔한 셈법은 헌법에 60일 규정이 있으니 두 달이면 새 부통령이 나온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헌법 8조 2항이 정한 것은 이렇다. 부통령 자리가 비면 MPR이 늦어도 60일 안에 회의를 연다. 대통령이 추천한 두 후보 가운데 한 명을 거기서 뽑는다.5 회의를 여는 시한이지 결론을 내는 시한이 아니다. 회의를 소집하는 일과 정당들이 표를 모으는 일은 전혀 다르다. 게다가 그 60일은 부통령 자리가 실제로 비어야 비로소 시작된다. 지금은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순서를 따져 보면 이렇다. 먼저 헌재가 이 청구를 형식을 갖춘 사건으로 받아들여 심리에 부쳐야 한다. 다음으로 그 심리가 자격 취소라는 결론에 닿아야 한다. 그다음에야 MPR의 시계가 돌기 시작한다. 그 시계마저 결국 의석 계산에 달려 있다. 지금 확인된 것은 청구서가 접수됐다는 사실 하나다. 첫 번째 문 앞에 서류 한 뭉치가 놓였을 뿐이다.
설령 문이 끝까지 열린다고 치자. 그다음 풍경은 어떨까. 새 부통령 후보 두 명을 고르는 사람은 프라보워 대통령이다. 뽑는 곳은 MPR이고, 그 다수는 국회(DPR) 의원이다. 2024년 집계로 국회 580석 중 470석, 약 81%가 여권 연합 몫이었다.6 이 구도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면 결론은 싱겁다. 부통령의 얼굴은 바뀌어도 정권의 방향은 대통령이 고른 범위 안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청구의 명분과 한국 기업이 걱정하는 정책 급변 사이에는 꽤 먼 거리가 있다.
반대쪽 셈법도 너무 쉽다. 학력 요건 조항을 다툰 위헌 심판이 이미 기각됐으니 이번 청구도 하나 마나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앞의 사건은 법률 조항이 헌법에 맞는지를 따졌다. 이번 청구는 특정 선거 결과의 효력을 다투는 선거 분쟁으로 보인다. 과녁이 다르면 앞선 기각이 방패가 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거꾸로 선거 분쟁이라면 제기 시한이 이미 한참 지난 것 아니냐는 반문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헌재가 사건을 어떤 이름으로 받아 적느냐에 달렸다. 그것은 헌재 원문을 봐야 안다. 유튜브 섬네일로는 알 수 없다.
같은 주에 또 하나의 졸업장 이야기가 법정에 올랐다. 조코위 전 대통령의 졸업장 진위를 둘러싼 사건이다. 로이 수료가 낸 다섯 번째 프리트라이얼(praperadilan)이었다. 9월 15일 자카르타 남부지방법원은 청구를 일부 받아들였다. 재무부가 위자료 500만 루피아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나머지 손해배상 청구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각했다.7
두 사건을 하나로 엮으면 이야기는 그럴듯해진다. 아버지의 졸업장, 아들의 졸업장. 유튜브가 좋아할 만한 구도다. 하지만 법원도, 절차도, 쟁점도 다르다. 그럴듯한 이야기와 확인된 사실은 다른 물건이다.
소음에도 경제학이 있다. 조회수는 불확실성에서 나오고, 결론이 늦을수록 영상은 늘어난다. “헌재가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문장 하나로 한 주 치 방송을 채울 수 있다. 그 방송을 보는 사람 중에는 자카르타의 한국 법인장도 있다. 유튜브는 판단의 재료가 될 수는 있어도 판단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기브란의 실제 학력이 어떤지도 이 칼럼이 판정할 일이 아니다. 공식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은 것을 단정하는 순간 칼럼은 선동이 된다. 이 칼럼이 따지는 것은 졸업장의 진위가 아니라 절차의 무게다.
애초에 부통령은 어떤 자리인가. 인도네시아 헌법 4조 2항은 부통령을 대통령의 직무를 돕는 자리로 정한다.8 인허가와 규제의 서명은 대개 부처 장관과 그 아래 관료 라인에서 나온다. 부통령이 맡은 역할은 대통령이 나눠 준 과제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부통령 교체설이 곧바로 공장 인허가 서류의 운명으로 이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음과 실무 사이의 거리를 재는 것, 그것이 대관 담당의 일이다.
그렇다면 자카르타에서 인허가를 기다리고 양해각서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 한국 법인은 무엇을 봐야 하나.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다. 헌재가 첫 번째 문을 열었느냐다.
본사에서는 벌써 전화가 올 것이다. “부통령이 바뀐다는데 우리 사업은 괜찮나.” 이때 대관 담당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답은 이것이다. 청구는 접수됐고, 헌재가 심리에 부쳤다는 공식 확인은 아직 없다. 그 확인이 나오기 전까지 결재 라인이 바뀐다고 볼 근거는 없다. 담당 공무원의 서명도, 장관의 서명도 어제와 같은 무게다.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있다. 소문을 근거로 현지 파트너나 정부 창구와의 관계를 서둘러 다시 짜는 일이다. 본사 보고서에 “부통령 교체 가능성”을 굵은 글씨로 올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인도네시아에서 관계는 느리게 쌓이고 빠르게 무너진다. 소문에 맞춰 줄을 바꿨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면 어떻게 되나. 그때 잃은 신뢰는 누구도 보상해 주지 않는다.
지켜볼 신호는 세 가지면 충분하다. 헌재가 사건번호를 붙여 심리 일정을 잡는지. 그 심리가 본안 판단으로 넘어가는지. MPR의 정당들이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하는지. 이 셋 중 하나라도 켜지면 그때 시나리오를 짜도 늦지 않다. 신호 없이 짠 시나리오는 보고서의 분량만 늘린다.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소란은 흔하고 결말은 느리다. 2023년의 결정도, 2024년의 판결도 그랬다. 문은 늘 요란하게 두드려졌지만, 열리는 속도는 법정과 의회가 정했다.
소음은 공짜지만 판단을 틀리는 값은 비싸다. 섬네일이 아니라 사건번호를 확인하는 것,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싼 보험이다.
- 청구 접수(2026-09-10)와 청구 취지, 청구인 그룹(KIPP·Partai Ummat 등), 대통령실 반발은 FAJAR(2026-09-10) 등 복수 매체 보도 기준. 데니 인드라야나의 법무인권부 차관 경력은 공개 이력 기준. MK 사건번호와 청구 취지 원문은 헌재 공식 자료로 대조하지 못했다. FAJAR; FAJAR
- 선거법 169조 r호의 학력 요건과 청구인들이 문제 삼은 외국 학력 동등성 증명서(싱가포르 Orchid Park Secondary School·호주 UTS Insearch 관련), 청구 시점(정부 출범 약 2년 뒤)은 Koran Sulindo·Sewaktu 등 2026-09 보도 기준. 이는 청구인 측 주장이며 편집국은 증명서의 효력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선거법 원문은 대조하지 못했다. Koran Sulindo
- 헌재 결정 90/PUU-XXI/2023(2023-10-16)의 연령 요건 예외, 안와르 우스만 소장과 조코위 대통령의 인척 관계, 헌재 윤리위원회(MKMK)의 2023-11-07 소장직 해임 결정은 헌재 공식 뉴스(mkri.id)와 Kompas(2023-11-07) 보도 기준. 결정문 원문은 대조하지 못했다. Kompas; Mahkamah Konstitusi RI
- 2024-04-22 헌재의 2024년 대선 결과 분쟁(PHPU) 기각과 재판관 3명(Saldi Isra·Enny Nurbaningsih·Arief Hidayat)의 반대의견은 CNN Indonesia·CNBC Indonesia(2024-04-22) 보도 기준. 결정문 원문은 대조하지 못했다. CNN Indonesia; CNBC Indonesia
- 헌법 8조 2항의 MPR 60일 회의 절차는 검색 요약 기준 복수 독립 출처로 교차 확인했으나 UUD 1945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60일은 회의 개최 시한이며 선출 확정 시한이 아니다.
- 2024-2029 국회 의석 구성(여권 연합 KIM Plus 470/580석, 약 81%)은 Tirto(2024) 집계 기준. 2024년 이후 연합 구성 변동은 확인하지 못했다. MPR은 DPR 의원과 지역대표회의(DPD) 의원으로 구성된다. Tirto
- 2026-09-15 자카르타 남부지방법원, 단독판사 I Ketut Darpawan. 일부 인용, 위자료 500만 루피아, 물질적 손해 청구는 증거 부족으로 기각. ANTARA·Media Indonesia·Suara 등 7개 이상 매체 일치, 판결문 원문 미대조. ANTARA; Media Indonesia
- 헌법(UUD 1945) 4조 2항의 부통령 규정은 일반 헌법 해설 기준이며 원문은 이번에 대조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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